왕장 (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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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장은 전한 시대의 인물로, 학문을 닦아 간대부, 좌조중랑장, 사례교위 등을 역임했다. 원제 때 권신 석현을 탄핵하려다 실패하여 파면되었고, 성제 때 경조윤이 되어 외척 왕봉의 권력 독점을 비판하다가 옥사했다. 경조윤에서 왕장은 왕존, 왕준과 함께 '삼왕'으로 불렸으며, 사후 가족은 유배되었으나 후에 고향으로 돌아와 부를 얻었다.
젊어서 장안에서 학문을 배웠다. 아내와 둘이 살았지만, 병이 나도 변변한 이불도 없고, 초라한 옷 위에 누워 있었다. 왕장은 아내에게 울면서 이별을 말하려 했지만, 아내는 "서울 대신들 중에도 당신을 능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금 병으로 고생한다고 기운을 내지 않고 울고 있다니, 얼마나 비겁합니까"라고 꾸짖었다.
2. 생애
그 후 벼슬에 올라 간대부가 되었고, 직언을 함으로써 조정에서 명성을 얻었다. 원제 초에 좌조중랑장으로 발탁되었다. 어사중승 진함과 사이가 좋았고, 권력을 잡은 중서령 석현을 탄핵했지만, 오히려 석현에게 함정에 빠져 진함은 곤형에 처해지고, 왕장은 파면되었다.
성제가 즉위하자 간대부에 임명되었고, 사례교위가 되어 대신과 외척들에게 두려움을 받았다. 하평 4년 (기원전 25년), 왕존 이후 인재를 얻지 못했던 경조윤으로 선임되었다.
당시, 외척 대장군 왕봉이 권력을 잡고 있었지만, 왕장은 왕봉에게 추천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왕봉이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왕장의 아내는 "사람은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초라한 옷에 누워 있던 때를 생각하지 않으십니까"라고 말하며 왕봉에게 반대하는 것을 말렸지만, 왕장은 듣지 않고, 성제에게 왕봉이 성제의 동생 정도왕 유강을 나라로 보낸 것, 왕봉이 승상 왕상과 다투어 왕상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 왕봉이 자신의 첩의 여동생으로 결혼한 적이 있는 여성, 장미인을 후궁에 들인 것 등을 비난하며, 파면하고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왕상과 정도왕의 일로 마음이 편치 않았던 성제는 그 말을 받아들여 "경조윤의 진언이 없었다면, 짐은 사직을 위한 계책을 듣지 못하고 끝났을 것이다"라고 왕장에게 말하고, 누구로 교체해야 할지 물었다. 왕장은 성제의 동생 중산왕의 외척인 풍야왕을 추천했고, 성제도 풍야왕으로 하려 했다. 이 대화는 사람을 물리치고 이루어졌지만, 시중이었던 왕봉의 친척 왕음이 엿듣고 이 사실을 왕봉에게 보고했다. 왕봉은 스스로 비통한 내용의 사직서를 제출했고, 황태후 왕씨(왕정군)도 그것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성제는 왕봉을 폐하기 어려워 왕봉을 위로하며 유임시켰다.
왕봉은 왕장을 "왕의 외척을 추천하는 것은 제후에게 아부하는 것이다. 또한 장미인의 건을 비판할 때 '강족도 여자가 낳은 첫 아이는 (자기 자식이 아닐 의심이 있어서) 죽이는데, 천자의 후궁에 최근까지 다른 사람에게 시집갔던 자가 있다니'라고 말해야 할 것이 아닌 것을 발언했다"고 상서에게 탄핵하게 했고, 왕장은 옥에 갇혔다. 정위는 장미인에 대한 발언을 "천자를 이민족에 비유하고, 또한 천자의 자손 번영을 끊으려는 것이다"라고 대역죄에 적용하여 왕장은 옥사했다.
경조윤에서는 그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생각하고, 그와 뛰어난 수완을 보인 왕존・왕준과 함께 "삼왕"이라고 불렀다.
왕장의 처자식도 옥에 갇혔고, 왕장이 죽은 후 합포로 유배되었다. 그 후, 왕봉의 동생 왕상이 권력을 잡자, 왕장의 가족을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왕장의 가족은 모두 모여 있었고, 진주를 채취하여 막대한 부를 얻었다. 당시 태산 태수였던 소육은 왕장의 밭과 저택이었던 곳을 왕장의 가족에게 반환했다.
2. 1. 관직 생활과 석현 탄핵
젊어서 장안에서 학문을 익혔다. 아내와 단 둘이서 살았는데, 병들었을 때 제대로 된 담요조차 없어 조잡한 옷가지 위에 드러누울 수밖에 없었다. 왕장은 울면서 아내의 임종을 준비하려 하였는데, 아내는 도리어 그러한 왕장을 질책하였다.
이후 왕장은 관직에 나아가 간대부가 되었고, 직언을 잘하여 조정에서 명성을 떨쳤다. 원제 초기에 좌조중랑장으로 발탁되었는데, 어사중승 진함과 함께 권신 석현을 탄핵하였으나 도리어 파면되었다.
성제가 즉위한 후 다시 간대부가 되었고, 이후 사례교위가 되어 대신과 외척들의 두려움을 샀다.
하평 4년(기원전 25년), 치적이 나빠 파면된 송등의 뒤를 이어 경조윤에 임명되었다. 당시 대장군 왕봉이 외척으로서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는데, 왕장은 비록 왕봉의 천거를 받은 자였지만 그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아내는 왕장에게 지난날의 어려웠던 시절을 이야기하며 왕봉을 거스르지 말라고 하였으나, 왕장은 듣지 않고 성제에게 왕봉을 파면하여야 한다고 진언하였다.
성제는 왕장의 의견을 받아들여 왕봉의 후임을 누구로 할 지 물었고, 왕장이 풍야왕을 추천하니 그대로 시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왕봉의 친척인 시중 왕음이 이를 엿듣고는 왕봉에게 알렸고, 왕봉은 곧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왕태후마저 소식을 듣고는 울면서 밥도 먹지 않으니, 성제는 차마 왕봉을 파면하지 못하고 잠시 대기시켰다.
한편, 왕봉은 처제 장미인(張美人)을 성제의 후궁으로 들여보냈었는데, 그녀는 다른 남자와 혼인한 적이 있었다. 왕장은 왕봉을 탄핵하면서, 오랑캐들조차 개가한 여자의 맏이를 죽이는 풍습을 갖고 있음을 거론하며 황실의 혈통을 지켜야 함을 주장하였다. 왕봉 또한 왕장을 탄핵하였고, 정위 범연수는 왕장이 천자를 오랑캐와 비교하는 대역죄를 저질렀다고 판결하였다. 결국 왕장은 옥중에서 죽었다.
함께 하옥되었던 처자식은 합포로 유배되었다. 이후 왕봉의 아우 왕상이 권력을 휘둘렀을 때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합포에서 진주를 캐내어 엄청난 돈을 벌고 있었다. 태산태수 소육은 예전에 왕장의 소유였던 밭과 집을 이들에게 돌려주었다.
2. 2. 성제 즉위와 왕봉과의 갈등
젊어서 장안에서 학문을 익혔다. 아내와 단 둘이서 살았는데, 병들었을 때 제대로 된 담요조차 없어 조잡한 옷가지 위에 드러누울 수밖에 없었다. 왕장은 울면서 아내의 임종을 준비하려 하였는데, 아내는 도리어 그러한 왕장을 질책하였다.
이후 왕장은 관직에 나아가 간대부가 되었고, 직언을 잘하여 조정에서 명성을 떨쳤다. 원제 초기에 좌조중랑장으로 발탁되었는데, 어사중승 진함과 함께 권신 석현을 탄핵하였으나 도리어 파면되었다.
성제가 즉위한 후 다시 간대부가 되었고, 이후 사례교위가 되어 대신과 외척들의 두려움을 샀다.
하평 4년(기원전 25년), 치적이 나빠 파면된 송등의 뒤를 이어 경조윤에 임명되었다. 당시 대장군 왕봉이 외척으로서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는데, 왕장은 비록 왕봉의 천거를 받은 자였지만 그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아내는 왕장에게 지난날의 어려웠던 시절을 이야기하며 왕봉을 거스르지 말라고 하였으나, 왕장은 듣지 않고 성제에게 왕봉을 파면하여야 한다고 진언하였다.
성제는 왕장의 의견을 받아들여 왕봉의 후임을 누구로 할 지 물었고, 왕장이 풍야왕을 추천하니 그대로 시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왕봉의 친척인 시중 왕음이 이를 엿듣고는 왕봉에게 알렸고, 왕봉은 곧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왕태후마저 소식을 듣고는 울면서 밥도 먹지 않으니, 성제는 차마 왕봉을 파면하지 못하고 잠시 대기시켰다.
한편, 왕봉은 처제 장미인(張美人)을 성제의 후궁으로 들여보냈었는데, 그녀는 다른 남자와 혼인한 적이 있었다. 왕장은 왕봉을 탄핵하면서, 오랑캐들조차 개가한 여자의 맏이를 죽이는 풍습을 갖고 있음을 거론하며 황실의 혈통을 지켜야 함을 주장하였다. 왕봉 또한 왕장을 탄핵하였고, 정위 범연수는 왕장이 천자를 오랑캐와 비교하는 대역죄를 저질렀다고 판결하였다. 결국 왕장은 옥중에서 죽었다.
함께 하옥되었던 처자식은 합포로 유배되었다. 이후 왕봉의 아우 왕상이 권력을 휘둘렀을 때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합포에서 진주를 캐내어 엄청난 돈을 벌고 있었다. 태산태수 소육은 예전에 왕장의 소유였던 밭과 집을 이들에게 돌려주었다.
2. 3. 왕장의 죽음과 그 이후
젊어서부터 장안에서 학문을 익혔다. 아내와 단 둘이서 살았는데, 병들었을 때 제대로 된 담요조차 없어 조잡한 옷가지 위에 드러누울 수밖에 없었다. 왕장은 울면서 아내의 임종을 준비하려 하였는데, 아내는 도리어 그러한 왕장을 질책하였다.
이후 왕장은 관직에 나아가 간대부(諫大夫)가 되었고, 직언을 잘하여 조정에서 명성을 떨쳤다. 원제 초기에 좌조중랑장(左曹中郞將)으로 발탁되었는데, 어사중승 진함과 함께 권신 석현을 탄핵하였으나 도리어 파면되었다.
성제가 즉위한 후 다시 간대부가 되었고, 이후 사례교위가 되어 대신과 외척들의 두려움을 샀다.
하평 4년(기원전 25년), 치적이 나빠 파면된 송등의 뒤를 이어 경조윤에 임명되었다. 당시 대장군 왕봉이 외척으로서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는데, 왕장은 비록 왕봉의 천거를 받은 자였지만 그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아내는 왕장에게 지난날의 어려웠던 시절을 이야기하며 왕봉을 거스르지 말라고 하였으나, 왕장은 듣지 않고 성제에게 왕봉을 파면하여야 한다고 진언하였다.
성제는 왕장의 의견을 받아들여 왕봉의 후임을 누구로 할 지 물었고, 왕장이 풍야왕을 추천하니 그대로 시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왕봉의 친척인 시중(侍中) 왕음이 이를 엿듣고는 왕봉에게 알렸고, 왕봉은 곧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왕태후마저 소식을 듣고는 울면서 밥도 먹지 않으니, 성제는 차마 왕봉을 파면하지 못하고 잠시 대기시켰다.
한편, 왕봉은 처제 장미인(張美人)을 성제의 후궁으로 들여보냈었는데, 그녀는 다른 남자와 혼인한 적이 있었다. 왕장은 왕봉을 탄핵하면서, 오랑캐들조차 개가한 여자의 맏이를 죽이는 풍습을 갖고 있음을 거론하며 황실의 혈통을 지켜야 함을 주장하였다. 왕봉 또한 왕장을 탄핵하였고, 정위 범연수는 왕장이 천자를 오랑캐와 비교하는 대역죄를 저질렀다고 판결하였다. 결국 왕장은 옥중에서 죽었다.
함께 하옥되었던 처자식은 합포로 유배되었다. 이후 왕봉의 아우 왕상이 권력을 휘둘렀을 때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합포에서 진주를 캐내어 엄청난 돈을 벌고 있었다. 태산태수 소육은 예전에 왕장의 소유였던 밭과 집을 이들에게 돌려주었다.
3. 평가
3. 1. 삼왕(三王)
젊어서 장안에서 학문을 배웠다. 아내와 둘이 살았지만, 병이 나도 변변한 이불도 없고, 초라한 옷 위에 누워 있었다. 왕장은 아내에게 울면서 이별을 말하려 했지만, 아내는 "서울 대신들 중에도 당신을 능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금 병으로 고생한다고 기운을 내지 않고 울고 있다니, 얼마나 비겁합니까"라고 꾸짖었다.
그 후 벼슬에 올라 간대부가 되었고, 직언을 함으로써 조정에서 명성을 얻었다. 원제 초에 좌조중랑장으로 발탁되었다. 어사중승 진함과 사이가 좋았고, 권력을 잡은 중서령 석현을 탄핵했지만, 오히려 석현에게 함정에 빠져 진함은 곤형에 처해지고, 왕장은 파면되었다.
성제가 즉위하자 간대부에 임명되었고, 사례교위가 되어 대신과 외척들에게 두려움을 받았다. 하평 4년(기원전 25년), 왕존 이후 인재를 얻지 못했던 경조윤으로 선임되었다.
당시, 외척 대장군 왕봉이 권력을 잡고 있었지만, 왕장은 왕봉에게 추천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왕봉이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왕장의 아내는 "사람은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초라한 옷에 누워 있던 때를 생각하지 않으십니까"라고 말하며 왕봉에게 반대하는 것을 말렸지만, 왕장은 듣지 않고, 성제에게 왕봉이 성제의 동생 정도왕 유강을 나라로 보낸 것, 왕봉이 승상 왕상과 다투어 왕상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 왕봉이 자신의 첩의 여동생으로 결혼한 적이 있는 여성, 장미인을 후궁에 들인 것 등을 비난하며, 파면하고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왕상과 정도왕의 일로 마음이 편치 않았던 성제는 그 말을 받아들여 "경조윤의 진언이 없었다면, 짐은 사직을 위한 계책을 듣지 못하고 끝났을 것이다"라고 왕장에게 말하고, 누구로 교체해야 할지 물었다. 왕장은 성제의 동생 중산왕의 외척인 풍야왕을 추천했고, 성제도 풍야왕으로 하려 했다. 이 대화는 사람을 물리치고 이루어졌지만, 시중이었던 왕봉의 친척 왕음이 엿듣고 이 사실을 왕봉에게 보고했다. 왕봉은 스스로 비통한 내용의 사직서를 제출했고, 황태후 왕씨(왕정군)도 그것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성제는 왕봉을 폐하기 어려워 왕봉을 위로하며 유임시켰다.
왕봉은 왕장을 "왕의 외척을 추천하는 것은 제후에게 아부하는 것이다. 또한 장미인의 건을 비판할 때 '강족도 여자가 낳은 첫 아이는 (자기 자식이 아닐 의심이 있어서) 죽이는데, 천자의 후궁에 최근까지 다른 사람에게 시집갔던 자가 있다니'라고 말해야 할 것이 아닌 것을 발언했다"고 상서에게 탄핵하게 했고, 왕장은 옥에 갇혔다. 정위는 장미인에 대한 발언을 "천자를 이민족에 비유하고, 또한 천자의 자손 번영을 끊으려는 것이다"라고 대역죄에 적용하여 왕장은 옥사했다.
경조윤에서는 그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생각하고, 그와 뛰어난 수완을 보인 왕존・왕준과 함께 "삼왕"이라고 불렀다.
왕장의 처자식도 옥에 갇혔고, 왕장이 죽은 후 합포로 유배되었다. 그 후, 왕봉의 동생 왕상이 권력을 잡자, 왕장의 가족을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왕장의 가족은 모두 모여 있었고, 진주를 채취하여 막대한 부를 얻었다. 당시 태산 태수였던 소육은 왕장의 밭과 저택이었던 곳을 왕장의 가족에게 반환했다.
4. 가계
5. 출전
반고의 한서 권19하 백관공경표 하, 권76 조윤한장양왕전에 전한의 경조윤을 역임한 기록이 있다. 왕장은 기원전 25년부터 기원전 24년까지 경조윤을 역임하였으며, 전임자는 송등이고 후임자는 봉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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